산조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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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조 천황은 레이제이 천황의 차남으로, 1011년부터 1016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67대 천황이다. 황태자 시절 이치조 천황보다 나이가 많아 '사카사노 모케노키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압력으로 장남이 아닌 이치조 천황의 차남이 황태자가 되었으며, 시력 감퇴로 40세의 나이에 양위했다. 42세에 출가 후 사망했으며, 묘소는 기타야마릉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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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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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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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산조 천황 |
일본어 | 三条天皇 |
로마자 표기 | Sanjō-tennō |
휘 | 이야사다 (Iyasada) / 오키사다 (Okisada) |
추호 | 산조인 (Sanjōin) 또는 산조 천황 (Sanjō-tennō) |
재위 | |
즉위 | 1011년 7월 16일 |
퇴위 | 1016년 3월 10일 |
화력 재위 기간 | 간코 8년 6월 13일 - 조와 5년 1월 29일 |
즉위례 | 1011년 11월 13일 (간코 8년 10월 16일) |
대嘗祭 (다이죠사이) | 1013년 1월 6일 (조와 원년 11월 22일) |
시대 | 헤이안 시대 |
연호 | 간코 조와 |
수도 | 헤이안쿄 |
황궁 | 헤이안 궁 |
능묘 | 기타야마 능 (北山陵) |
가계 | |
아버지 | 레이제이 천황 |
어머니 | 후지와라노 초시 |
배우자 | 후지와라노 세이시 후지와라노 겐시 |
자녀 | 아쓰아키라 친왕 아쓰노리 친왕 아쓰히라 친왕 마사코 내친왕 시시 내친왕 성신 입도 친왕 데시 내친왕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976년 2월 5일 |
출생지 | 헤이안쿄 (교토) |
사망일 | 1017년 6월 5일 |
사망지 | 산조인 (三条院), 헤이안쿄 (교토) |
매장지 | 기타야마노 미사사기 (北山陵) (교토) |
기타 정보 | |
왕가 | 일본 황실 |
선대 천황 | 이치조 천황 |
계승 천황 | 고이치조 천황 |
2. 연보
연도 (서력) | 연도 (일본 연호) | 날짜 (음력/양력) | 내용 |
---|---|---|---|
976년 | 덴엔 4년 | 레이제이 천황과 뇨고 후지와라 쵸시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7세 때 사망하자 외조부인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저택에서 자랐다.[21] | |
986년 | 간나 2년 | 7월 16일 / 8월 23일 | 6월 23일 가잔 천황이 출가하고 7세의 이치조 천황이 즉위하자, 11세의 나이로 황태자(도궁)가 되었다. 이는 레이제이와 엔유 두 계통이 번갈아 즉위하는 양통질립 원칙에 따른 것이었으나, 황태자가 천황보다 나이가 많아 거꾸로 된 황태자라는 의미의 사카사노 모케노키미(逆さの儲けの君일본어)라는 별명을 얻었다.[9][10][21] 외조부 가네이에의 정치적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23] |
989년 | 에이소 3년 | 숙모인 후지와라노 스이시가 동궁비로 입궁했다. | |
991년 | 쇼랴쿠 2년 | 후지와라노 스미토키의 딸 후지와라노 세이시가 입궁했다. | |
994년 | 쇼랴쿠 5년 | 세이시 소생의 장남 아쓰아키라 친왕이 태어났다. | |
995년 | 쇼랴쿠 6년 | 외숙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의 딸 후지와라노 겐시가 입궁했으나, 스이시와 겐시는 일찍 사망했다. | |
1010년 | 간코 7년 | 외숙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딸 후지와라 겐시가 입궁했다. | |
1011년 | 간코 8년 | 6월 13일 / 7월 16일 | 이치조 천황이 재위 25년 만에 양위하자, 36세의 나이로 제67대 천황으로 즉위했다(센소, 소쿠이).[11] |
6월 22일 / 8월 29일 | 이치조 상황이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2] | ||
8월 23일 / 8월 30일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에게 우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들어오는 특권을 부여했다.[9] | ||
10월 24일 / 11월 28일 | 아버지 레이제이 상황(다이죠 덴노)이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 | ||
이치조 천황의 차남 아쓰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본래 산조 천황의 장남 아쓰아키라 친왕이 황태자가 되어야 했으나, 외손자의 즉위를 서두르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강력한 압력으로 아쓰나리 친왕이 책봉되었다.[14][21] | |||
1012년 | 조와 원년 | 연호를 조와(長和)로 개원했다. | |
8월 | 오랜 반려였던 후지와라노 세이시를 황후로 책봉하고,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딸 겐시를 중궁으로 삼아 두 명의 정실을 두는 상태가 되었다. 이는 미치나가와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6][21] | ||
1013년 | 조와 2년 | 3월 | 일본의 주요 21개 사찰에 곡물을 봉납했다.[15] |
중궁 겐시가 딸 데이시 내친왕을 낳았다. 아들을 원했던 미치나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21] | |||
9월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저택을 방문했다.[15] | ||
11월 | 이와시미즈 하치만궁을 참배했다. 이후 천황들이 매년 이곳을 참배하는 관례의 시초가 되었다.[15] | ||
12월 | 가모 신사를 참배했다. 이 역시 이후 천황들의 연례 참배 관례로 이어졌다.[15] | ||
12월 | 중궁 소속 무관 후지와라노 마사노부가 후지와라노 고레카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치나가는 고레카네를 투옥시켰다.[15] | ||
1014년 | 조와 3년 | 2월 9일 / 3월 12일 | 황궁이 화재로 소실되었다.[15] |
5월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저택을 방문하여 승마와 궁술을 즐겼다.[15] 이 무렵부터 안질을 앓기 시작했는데, 연단술에 따른 선단 복용 부작용이라는 설이 있다.[24] | ||
1015년 | 조와 4년 | 9월 | 소실되었던 황궁이 재건되었다.[15] |
10월 |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50세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15] | ||
11월 | 재건된 황궁이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25][15] | ||
1016년 | 조와 5년 | 1월 29일 / 3월 10일 | 안질이 악화되고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계속된 양위 압력에 시달렸다. 결국 장남 아쓰아키라 친왕을 황태자로 세운다는 조건을 걸고 황태자 아쓰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에게 양위했다. 재위 기간은 6년이었으며, 태상천황(다이죠 덴노)이 되었다.[16][17] |
고이치조 천황이 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 |||
1017년 | 간닌 원년 | 4월 23일 / 5월 21일 | 고이치조 천황의 즉위를 기념하여 연호를 간닌(寛仁)으로 개원했다.[18] |
4월 29일 / 5월 27일 | 출가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다.[9] | ||
5월 9일 / 6월 5일 | 42세(만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양위 후 머물던 산조인(三条院)의 이름을 따 산조인(三条院)이라는 법명을 얻었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 산조 천황으로 불리게 되었다. | ||
8월 9일 | 황태자 아쓰아키라 친왕이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무언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황태자 자리를 사퇴했다. 이로써 레이제이-엔유 양통질립은 끝나고 황위는 엔유 천황의 직계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산조 천황의 딸 데이시 내친왕이 낳은 아들이 훗날 고산조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산조 천황의 혈통은 황실에 계속 이어졌다. |
레이제이 천황의 둘째 아들로 덴엔 4년(976년)에 태어났다.[6] 어머니 후지와라노 초시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레이제이 천황마저 정신 질환을 앓아, 외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간나 2년(986년), 가잔 천황이 갑작스럽게 퇴위하고 어린 이치조 천황이 즉위하자, 11세의 나이로 황태자가 되었다. 이는 당시 레이제이 계통과 엔유 계통이 번갈아 황위를 잇는 양통질립의 관례와 외할아버지 가네이에의 정치적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였다.[23] 하지만 황태자가 천황보다 나이가 많아 '거꾸로 된 황태자'라는 뜻의 '''사카사노 모케노키미'''(逆の儲けの君일본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산조 천황의 무덤은 교토시에 있는 '''기타야마노 미사사기'''(北山陵)로 비정되어 궁내청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1]
3. 생애
간코 8년(1011년) 6월, 이치조 천황이 병으로 양위하면서 36세의 나이로 마침내 황위에 올랐다.[11] 그러나 즉위 과정에서부터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외숙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강력한 입김이 작용하여, 자신의 장남 아쓰아키라 친왕 대신 미치나가의 외손자인 아쓰나리 친왕(훗날 고이치조 천황)을 황태자로 삼아야 했다.[14][21]
산조 천황은 직접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나, 재위 기간 내내 미치나가와의 갈등에 시달렸다. 조와 원년(1012년), 미치나가의 딸 후지와라노 겐시를 주고(中宮)로 맞이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자신을 지지해 온 후지와라 세이시를 황후(皇后)로 책봉하면서 미치나가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21] 게다가 겐시가 황자를 낳지 못하자 미치나가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21]
조와 3년(1014년)부터는 심각한 안질을 앓기 시작하여 시력을 거의 잃게 되었고,[24] 내리(內裏, 황궁)가 두 차례나 큰 화재로 소실되는[25][15] 등 불운이 겹쳤다. 미치나가는 천황의 건강 악화를 빌미로 끊임없이 양위를 압박했다.
결국 조와 5년(1016년), 산조 천황은 자신의 아들 아쓰아키라 친왕을 다음 황태자로 세운다는 조건을 내걸고 미치나가의 압력에 굴복하여 고이치조 천황에게 양위했다.[16][17] 이듬해인 칸닌 원년(1017년) 출가하였으나,[9] 얼마 지나지 않아 42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5] 법명은 산조인(三条院일본어)이다.[5]
산조 천황 사후, 양위 조건이었던 아들 아쓰아키라 친왕의 황태자 지위는 미치나가의 압력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스스로 사퇴하는 비운을 맞았다.[21] 이로써 레이제이-엔유 양통 첩립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산조 천황의 딸 테이시 내친왕이 훗날 고산조 천황을 낳으면서 그의 혈통은 황실 내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3. 1. 출생과 황태자 시절
레이제이 천황의 둘째 아들로, 덴엔 4년(976년)에 태어났다.[6] 즉위 전의 이름(휘)은 이야사다 친왕(居貞親王일본어)[4][5]이었으며, 스케사다 친왕(すけさだ しんのう일본어)[6] 또는 오키사다 친왕(おきさだ しんのう일본어)[7]으로도 불렸다. 어머니는 셋쇼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딸인 후지와라노 초시(藤原超子, ?-982)이다.[9] 이복 형으로는 가잔 천황이 있다.[8]
7세 때 어머니 초시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레이제이 천황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21] 후견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후 외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저택에서 자랐다. 『오카가미』에 따르면, 외모가 가네이에와 매우 닮아 그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간나 2년(986년) 6월 23일, 가잔 천황이 갑작스럽게 출가하여 7세의 이치조 천황(이야사다 친왕의 사촌)에게 양위했다. 같은 해 7월 16일, 11세의 이야사다 친왕은 외할아버지 가네이에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황태자(도궁)로 책봉되었다.[23] 이는 당시 레이제이 계통과 엔유 계통이 교대로 황위를 잇는 양통질립의 관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황태자가 천황보다 4살이나 많았기 때문에 '거꾸로 된 황태자'라는 의미의 '''사카사노 모케노키미'''(逆の儲けの君)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네이에가 레이제이 계통인 이야사다 친왕을 황태자로 세운 배경에는, 엔유 천황과의 불화, 자신의 딸 초시가 레이제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3명의 아들을 낳은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21] 또한 손자인 이치조 천황이 즉위하고 자신이 섭정이 되면서, 또 다른 손자인 이야사다 친왕까지 황태자로 만들어 권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23]
황태자 시절, 그의 후궁에는 여러 여성이 들어왔다.
이치조 천황의 치세 동안 외조부 가네이에 사후에는 외삼촌인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장악하며 황태자 이야사다 친왕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3. 2. 즉위와 후지와라 가문의 압력
간코 8년(1011년) 6월 13일, 이치조 천황이 재위 25년 만에 병세가 위독해져 양위하자, 그의 사촌이자 황태자였던 이야사다 친왕이 3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산조 천황).[11] 하지만 황태자 자리에는 산조 천황의 장남 아쓰아키라 친왕이 아닌, 이치조 천황의 둘째 아들이자 당대 최고 권력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외손자인 아쓰나리 친왕(훗날 고이치조 천황)이 책봉되었다. 이는 미치나가의 강력한 압력 때문이었다.[14][21] 산조 천황 즉위 직후인 6월 22일에는 이치조 상황이 32세로 승하했고,[12] 같은 해 10월 24일에는 아버지 레이제이 상황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13]
산조 천황의 외조부 후지와라노 가네이에 사후, 외숙인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장악했다. 특히 미치나가는 이치조 천황 재위 기간부터 간파쿠(섭정)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자신의 외손자인 아쓰나리 친왕을 하루빨리 즉위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15] 그는 산조 천황의 치세에도 섭정 지위를 유지하며[9]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고, 1011년 8월에는 수레를 타고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특권을 받기도 했다.[9]
산조 천황은 직접 정치를 하고자 했으나, 미치나가와의 관계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조와 원년(1012년), 산조 천황은 미치나가의 딸 후지와라노 겐시를 주고(중궁)로 삼았지만,[6] 동시에 오랜 기간 자신을 지지해 온 후지와라 세이시를 황후로 책봉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명백히 미치나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미치나가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겐시가 아들이 아닌 딸 테이시 내친왕만을 출산하면서[21] 미치나가와 산조 천황의 관계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21]
조와 3년(1014년), 산조 천황은 안질을 앓기 시작하여 시력을 거의 잃는 지경에 이르렀다.[24] 미치나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천황의 건강 문제를 명분으로 끊임없이 양위를 강요했다. 설상가상으로 1014년과 1015년에 내리(황궁)가 연이어 화재로 소실되는[25][15] 불운까지 겹치면서, 병세 악화와 미치나가의 계속되는 압박 속에서 산조 천황은 결국 양위를 결심하게 된다.
조와 5년(1016년) 1월 29일, 산조 천황은 자신의 아들인 아쓰아키라 친왕을 황태자로 세운다는 조건을 내걸고 미치나가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쓰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16][17]
3. 3. 잦은 화재와 질병
산조 천황의 재위 기간 중 황궁은 두 차례의 큰 화재를 겪었다.
또한, 산조 천황은 재위 말년에 건강 문제에 시달렸다.
3. 4. 양위와 죽음
조와 3년(1014년), 산조 천황은 안질을 앓기 시작했다. 일설에는 연단술의 일종인 선단(仙丹) 복용 직후 시력을 잃었다고도 한다.[24]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천황의 안질을 명분 삼아 끊임없이 양위를 압박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해와 다음 해에 내리(천황의 거처)가 연이어 화재로 소실되는[25][15] 등 불운이 겹쳤다.
병세가 악화되자, 조와 5년(1016년) 1월, 산조 천황은 황후 후지와라 세이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츠아키라 친왕을 황태자로 세운다는 조건을 받아내는 대신, 미치나가의 양위 요구를 수락했다.[16] 1016년 3월 10일 (조와 5년 1월 29일), 재위 6년 만인 40세의 나이로 사촌인 아츠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에게 양위하고 태상천황이 되었다.[17][16]
이듬해인 칸닌 원년(1017년) 5월 27일 (칸닌 1년 4월 29일), 산조 상황은 출가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다.[9] 그러나 출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017년 6월 5일 (칸닌 1년 5월 9일), 42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5]
양위 후 머물렀던 궁의 이름을 따서 사후에 산조인(三条院일본어)이라는 법명을 얻었다.[5] 이후 메이지 시대에 '인(院)'이 '천황'으로 바뀌어 현재의 시호가 되었다. 그의 능묘는 교토에 있으며, 궁내청은 이곳을 '기타야마노 미사사기'(北山陵)로 공식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19][1]
산조 천황이 양위 조건으로 내걸었던 아츠아키라 친왕의 황태자 지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8월 9일, 아츠아키라 친왕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무언의 압력을 받아 스스로 황태자 자리를 사퇴했다.[21] 이로 인해 레이제이 천황과 엔유 천황의 계통이 번갈아 즉위하던 양통 첩립은 종지부를 찍고, 황위는 엔유 천황의 직계 후손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산조 천황의 딸인 테이시 내친왕이 훗날 고산조 천황을 낳으면서, 산조 천황의 혈통 역시 황실 내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4. 가족 관계
( 性信入道親王|쇼신 뉴도신노일본어 )
(동궁 시절)
(동궁 시절)